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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국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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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와 면의 탄생







 

국수라는 말의 정확한 어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의 외국어 통역기관인 사역원司譯院에서 교재로 사용된 『번역노걸대飜譯老乞大(14세기 경으로 추정)』에 습면濕麵을 설명하는 구절에 ‘국슈(국수)’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할 정도로 국수는 오래된 한민족의 고유 말이다. 한자어인 면麵은 국수와 더불어 한민족의 면 문화를 총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어 왔다. 면이란 단어는 국수를 지칭하는 단어이자 밀가루라는 이중의 뜻으로 사용된 탓에 종종 혼란을 불러온다. 이런 혼란은 면이란 말과 음식 문화를 완성시킨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후한後漢시대의 한자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면麵이 ‘맥의 가루( 粉)’라고 설명되어 있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먹거리는 병餠이라고 적고 있다. 중국의 대부분의 면식문화는 송나라 특히 남송南宋시대(1127~1279)에 강남과 화북의 문화가 섞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금나라에 밀려 남으로 내려온 화북華北사람들의 발달한 면식문화가 강남에 전해지면서 강남 사람들은 밀가루를 지칭하던 면을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통칭해서 부르기 시작한다. 면이라는 말은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중국인들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밀가루로 만든 면 음식뿐만 아니라 메밀이나 곡물 가루로 만든 모든 음식을 면 음식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쌀을 중심으로 기장이나 조 같은 입식(낱알)을 그대로 먹는 음식이 주를 이루었던 농경의 전통이 완전히 자리 잡은 한반도에서 갈아서 가공해 먹는 국수는 별식의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잔치에 가장 많이 사용된 탓에 오늘날까지 국수는 잔치음식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게 된다. 한반도에서 국수나 면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메밀이 주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정설이다. 이런 설의 가장 큰 근거는 한반도는 밀보다는 쌀의 생산에 적합한 기후라는 것이다. 기후적 요인에 더해 쌀을 기반한 농경문화가 굳게 뿌리 내린 것도 이런 설을 뒷받침한다.

한민족 국수의 대표주자는 메밀면

지금은 밀로 만든 면이 국수의 대세를 이루지만 한민족이 20세기 초반까지 가장 즐겨 먹던 국수는 메밀로 만들었다. 밀가루처럼 글루텐이라는 성분이 없어 찰기가 부족한 탓에 메밀면은 늘여 먹거나 잘라 먹는 방식이 아닌 눌러서 만드는 압착면壓搾麵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메밀이 13세기 몽고족이 침입할 때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속설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그 이전부터 한국인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먹어왔던 식재료였다.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해역에서 2009년에 발견된 마도 1호선, 마도 2호선, 마도 3호선에는 다량의 도기와 더불어 도기에 담긴 물건의 성격을 알려주는 목간木簡이 발견되었다. 마도 1호선과 마도 3호선에서는 목맥木麥(메밀)이라고 쓴 목간이 발견되었고 2호선에서는 메밀이 발견되었다. 마도 1호선은 1208년에 운행중임을 알리는 목간이 발견되었고 마도 3호선은 1265~1268년 사이에 난파된 배로 밝혀졌다. 마도 1호선의 메밀에 관한 기록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책에 등장하는 메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6세기 전반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236년 고려 고종 때 지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이다. 그러나 722년 일본의『속일본기續日本紀』에 메밀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을 봐서 그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메밀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1996년에 발표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DNA 분석에 의하면 메밀이 중국의 화북지방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들어간 시기는 대략 2000년 전에서 3000년 전 사이로 확인되고 있다. 메밀은 한문으로는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라 부르는데 목맥이란 말은 잘못된 것이다. 한자 ‘木麥’은 ‘모밀’의 음차이기 때문이다. 모밀의 어원으로 언어학자들은 ‘뫼(산의 옛말)+밀’의 합성어로 ‘산에서 나는 밀’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일부에서는 ‘모가 난밀’이란 의미로 모밀이란 말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주로 모밀이란 말이 메밀 대신에 사용되었다. 메밀을 이용한 대표적인 면으로는 막국수와 평양냉면이 있다. 막국수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화전민들이 주로 먹던 음식이었다. 막국수는 1970년대 초 화전민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 춘천 소양강댐 공사 시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위해 막국수집들이 본격적으로 영업을 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알린 음식이다.

평양이 속해 있는 평안도는 예부터 메밀의 주산지였다. 가정에서 누구나 즐겨먹던 평양냉면은 19세기 말부터 상업적인 음식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에 평양냉면을 파는 식당들이 서울에도 세워졌고, 1911년에는 평양에 평양조선인면옥조합이 생길 정도로 대중적인 외식이 된 음식이다. 메밀은 오랫동안 가장 대중적인 국수의 재료였지만 산출량이 적고 끈기가 적어 다양한 방법으로 만들기에 한계를 가진 식재료였다.


밀과 밀국수의 한반도 도입

한반도에 밀이 들어온 것은 4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시대의 군창지軍倉址에서 밀은 쌀, 보리, 녹두 다음으로 많은 양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 밀로 만든 음식을 먹은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밀가루와 면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기록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간 뒤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1123)』에 처음 나온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나라에 소맥小麥(밀)의 산출이 적어서 경동도京東道(송나라 변경에서 산동성, 하남성에 이르는 지역)에서 사오므로 그 값이 비싸서 성례에서만 쓴다’라고 적고 있다. 밀가루는 고려의 수도 개경 주변의 황해도가 주 생산지였다. 고려도경에 적힌 것처럼 생산량이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생산량과 소비량이 적었는지는 외국인이 기록한 하나의 기록만 가지고 확정 지을 수 없다. 당시 경제의 중심지였던 사원들이 밀가루를 이용한 양조업과 조면업을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의 대 학자 이색은 밀국수에 관한 시를 여러 편 남긴다. 고려시대에 관료나 학자들에게 국수는 그리 낯선 음식이 아니었다.


20세기에 본격화되는 밀가루 국수 문화

밀국수 문화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밀을 밀가루로 가공하는 제분업의 발달이었다. 1919년 만주제분의 진남포공장이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의 제분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진남포는 일제의 중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이자 한반도에서 밀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황해도의 중심 항이었다. 1921년에는 풍국제분이 인천과 경성에 공장을 내면서 일제 강점기 밀가루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을 지속한다. 하지만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은 한반도의 제분 산업을 괴멸시킨다.

1955년 제분공장들이 남한에서 재가동되면서 제분산업은 다시 시작된다.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밀가루 무상원조가 시작되면서 밀가루 음식은 조금씩 남한의 먹거리 문화에 중요한 상수로 자리 잡게 된다. 1961년과 1962년 연 이은 흉작으로 쌀과 보리 작황이 나빠지게 되자 1962년 정부는 식량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12월 1일부터 미곡소비절약에 관한 범국민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이때 시작된 미곡소비절약운동의 핵심 내용은 밀가루 음식, 즉 분식粉食의 대중화였다. 이런 흐름 속에 1960년대 후반부터 밀가루 음식의 전성시대가 본격적으로 이 땅에 자리 잡는다. 1960년 이후 경상도 지역에는 마른 형태로 먹는 소면이 산업화의 선봉이었던 가난한 노동자들의 간편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부산의 구포국수와 대구의 수많은 건면 공장들도 이때부터 1970년대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70년대 최고의 외식이었던 짜장면과 인스턴트라면, 칼국수 같이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밀가루국수의 전성기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글·사진.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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